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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130. 파란 골목길의 고양이들, 쉐프샤우엔의 인연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새벽 6시, 마리아와 버지니아가 에싸위라로 가는 버스를 타러 출발한다. 나도 따라 일어난다. 예약해 둔 택시가 호스텔 앞에 와 있다. 나는 북쪽으로 가고 그들은 남쪽으로 가야 한다. 나의 남은 스페인 여정을 바꿔놓은 사람들,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했던 친구들과의 이별이다. 호스텔 주인 할아버지와 함께 두 사람을 배웅한다. 외롭던 여행길에 두 손을 내밀어 기꺼이 친구가 되어준 이들에게 겨우 이 정도밖에 해줄 것이 없다. 파란 택시를 타고 새벽 어스름이 깔린 마을을 떠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든다.

너무 이른 시각이라 혼자 루프탑에 올라 해 뜨는 것을 바라본다. 엊그제 아침식사 같이하면서, 이곳에서 일출을 꼭 보라고 신신당부 하던 프랑스 남자의 말이 맞다. 메디나도 아닌 호스텔에서 보이는 일출은 생각보다 훨씬 아름답다. 산너머의 붉은 해가 파란 마을을 덮어오는 장면이 가관인 것이다. 해가 뜨면서 옥상에 따뜻한 햇살이 내리비친다. 곧이어 어제의 프랑스 커플이 나오고 그제야 잠이 깬 칭루도 옥상으로 올라온다. 아침식사를 기다리며 앉아있는데 프랑스인들이 학종이처럼 작은 종이를 열심히 말고 있다. 자세히 보니 롤링 타바코라 불리는 가루담배다.

유럽은 담배가 비싸다고 롤링 타바코를 피우는 사람들이 많긴 하다. 필터가 없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종이를 펴서 조잡해 보이는 작은 필터를 올려놓고 담뱃가루를 뿌려 종이 마는 것을 보여준다. 이 근처에서 마리화나도 손쉽게 구할 수 있다면서, 그들은 3주의 휴가를 쉐프샤우엔에서 보내고 있다고 한다. 휴가기간에만 히피가 되었다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오늘 낮 3시 차로 탕헤르로 떠날 예정이라 배낭을 주인 할아버지께 맡겨놓고 칭루와 함께 우타엘함맘 광장으로 나간다. 탕헤르에서 하룻밤을 자고 어제저녁 쉐프샤우엔에 도착한 칭루는 모로코도 낯설고, 쉐프샤우엔도 처음이라 메디나의 골목에는 더더욱 적응을 못한다. 먼저 와서 지리를 알게 된 내가 칭루를 가이드하는 상황이 된다.

건축 디자이너인 그녀는 파란 쉐프샤우엔의 메디나를 너무나 좋아한다. 몇 발자국 떼 지도 않았는데 나타나는 고양이들도 칭루에게는 별세계다. 하긴 처음엔 나도 그랬을 것이다. 메디나의 푸른 골목 어딘가에 새초롬한 얼굴로 앉아 나를 쳐다보던 고양이들은 독특한 풍경이었다.

아침 골목의 아주 작은 가게, 바부슈를 신고 물건을 정리하는 할아버지, 그 뒤에 아무렇지도 않데 앉아 있는 고양이 두 마리, 파란 문, 하얀 벽, 예쁜 창살…. 모두가 쉐프샤우엔 메디나의 풍경이다. 나는 다시 못 볼 풍경이고 칭루는 처음 보는 장면이니 둘에게 모두 소중한 풍경이다. 알고 있는 최대한 정보를 알려주면서 칭루와 함께 걷는 메디나는 정겹다.

칭루와 함께 있으니 미처 보지 못한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등불과 거울 파는 가게는 오늘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녀의 커다란 DSLR이 바쁘게 움직인다. 상상해보지 못한 파란색에 취해 셔터를 눌러대는 모습이 엊그제 딱 나의 모습이다.

버스시간이 많이 남은 나와 메디나를 돌아다니는 게 행운이라는 칭루는 특이하게도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일본에서 일하는 중국인이다. 활달한 성격은 아니지만 차분하면서도 스스럼없는 그녀의 모습에 금방 마음이 열린다. 메디나 골목길을 다니는 법을 대략 알려주고 광장의 까페에서 설탕이 듬뿍 들어간 달달한 민트티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가 보여주는 여행 노트는 거의 예술이다. 그림으로 모로코에서 할 일들을 모두 정리해 왔다. 나도 세상에서 하나뿐인 내 여행 다이어리를 꺼낸다. 나의 여정을 이야기하니 그녀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우유니 소금사막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기도 하고, 다이어리를 보니 분명히 내 혈액형이 A형일 거라며 깔깔거리기도 한다. 무엇보다 내 여행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어주는 그녀가 나도 좋다. 열흘간의 휴가를 쏟아부어 일본에서 모로코로 날아온 칭루는 사하라 사막에 가기 위해 모로코에 왔다. 사하라 사막을 사랑했던 대만 작가 싼마오의 책을 둘 다 읽었다는 사실에 대화는 흥미를 더한다. 칭루와는 공통 관심사도 많고 감성적으로도 잘 맞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동행이 되면 너무 잘 맞을 친구지만, 우리의 여정은 여기서 엇갈린다. 내 모로코 여행은 막바지를 향하고 그녀의 여행은 막 시작되었다. 그녀는 남쪽의 페스로 내일 떠날 것이고 나는 오늘 북쪽 탕헤르로 가야 한다. 여행의 엇갈림이 아쉽지만, 여행도 인생도 그런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알기에 서로의 행운을 빌어준다.

길었던 티타임을 마치고 조금 더 돌아다니다 점심을 먹고 떠나기로 한다. 색색의 종이에 싼 물건을 파는 예쁜 가게에는 향기가 넘친다. 각종 고체 향수와 아르간 오일을 파는 곳이다. 알록달록한 색감과 은은한 향기들이 시각과 후각을 자극한다. 사지도 않을 거면서 구경만 하며 다녀도 재미있다. 

수크 한 구석의 꽃도 예쁘다. 꽃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나는 좋다. 꽃을 만지는 사람들의 손길은 언제나 곱다. 꽃에 눈길을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눈길이 사랑스럽다. 모로코 사람들이 꺾어 신은 것처럼 늘 신고 다니는 가죽 바부슈도 꽃을 닮았다. 뾰족한 모자가 달린 젤라바를 입고 뾰족코의 바부슈를 신고 파란 골목을 활보하는 쉐프샤우엔의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좋다.

레스토랑에 찾아가 늦은 점심을 주문한다. 요리사 한 사람, 서빙하는 사람도 한 사람이라 아주 천천히 서빙이 되는 중이다. 기다리는 동안 칭루는 쉐프샤우앤에서 하루를 더 머물지 말지를 고심한다. 호스텔로 돌아가 배낭을 들고 다시 큰길로 나와 택시를 타려면 시간이 걸리는데 주문한 음식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간다. 

한참 후에 칭루가 주문한 요리를 다 먹고 나서도 내 요리는 나오지 않는다. 결국 점심메뉴를 받아보지 못하고 칭루를 레스토랑에 남겨두고 일어설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잘 맞던 그녀와 이런 어수선한 이별이라니, 원하지 않고 어울리지 않지만 시간이 촉박하다. 칭루에게 내 몫의 점심값을 주고는 바쁘게 일어서서 짧은 인사를 나눈다.

카스바 옆 골목을 지나 큰길을 뛰어서 호스텔로 간다. 주인 할아버지가 보관해 두었던 배낭을 꺼내와 메는 걸 도와주신다. 바쁜 마음이지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할아버지가 두 뺨을 대며 인사를 하는 도스베소스를 해 주신다. 영문을 모르는 할아버지의 잔잔한 인사에 마음이 일순간에 푸근해진다. 나는 무엇이 그리 급한 것일까? 칭루처럼 시간이 촉박한 여행자도 아니니 만일 탕헤르 가는 버스를 놓치면 다시 여기로 돌아와도 그만일 텐데…. 

결국은 버스를 놓치지도 않았다. 택시를 타고 CTM터미널에 도착하니 오히려 30분쯤 여유가 있다. 게다가 페스(Fes)와 테투안(Tetuan)으로 가는 버스 시간도 비슷해서 어제의 트레킹 멤버 중 칼라와 스테판 부부, 라이문도를 터미널에서 만나 다시 한 번 작별인사를 하게 되었다. 정말 알 수 없는 게 한 치 앞의 일이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타서 자리에 앉고 나니, 비로소 칭루와 제대로 작별인사를 못한 게 아쉬워진다. 메일이든 페이스 북이든 연락은 지속되겠지만 한 번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는 어려운 것이 여행의 인연임을 알기에 마음한 구석이 찡하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담담히 겪어내는 것이, 여행길에서 습득한 행복의 비밀인지도 모르겠다.

네 시간 쯤 후 버스는 탕헤르 시내에 멈춘다.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페인 땅과 마주 보는 탕헤르(Tangier)는 국경의 항구도시다. 그래서인지 호스텔은 모로코 전통 분위기가 사라지고 스페인의 쾌적함이 자리한다. 모로코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온 탕헤르에서 마지막 여정을 보낼 것이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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