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초상 그린 네편의 영화…작지만 큰 울림이…
노인의 욕망 다룬 ‘환상의 그대’은퇴 기관사의 탈선 ‘오슬로의…’
애틋한 순애보 ‘그대를…’이어
노부 부 삶 반추 ‘어너더…’개봉
…
만년의 의미 살피는 작품 눈길
미국 영화의 거장 우디 앨런 감독은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자신이 연출한 최근작에 직접 출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여자를 낚는 남자 역할이 아니라면 재미없다. 나는 여성과 레스토랑에 마주앉아 눈을 바라보며 거짓말을 늘어놓는 남자 역할이 하고 싶다. 난 74살이지만 현명해지지도, 배려심이 깊어지지도 않는다. 허리는 아프고 시력은 떨어진다. 늙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국내에서도 최근 개봉한 영화 ‘환상의 그대’의 서두는 우디 앨런답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맥베스에서 발췌 인용한 대사다.
“인생이란 걸어 다니는 그림자. 무대에서 한동안 활개치고 안달하다 끝내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는 가엾은 배우. 소란과 광기가 가득하나 결국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
영화 ‘환상의 그대’는 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몇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중 노년에 이른 알피(앤서니 홉킨스)는 “인생이 덧없이 흘러가는 게 두려웠다”며 수십년간 같이 산 부인을 버리고 한참 연하인 딸 또래의 젊은 여성이자 한눈에도 천박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삼류 배우와 결혼한다. 펄펄 끓는 젊은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해 알피는 매번 비아그라에 의지해 보지만, 늘 “잠깐만 5분만 참아줘”라고 얘기해야 한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노년의 삶을 다룬 국내 외화들이 잇따른다. 이들 영화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황혼기, 언젠가 마주해야 하는 삶과 욕망의 다양한 면모를 그렸다. 우디 앨런 영화 속의 돈 많은 노인은 나이와 세월을 거꾸로 먹는 욕망에 충실하지만 우리네 보통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만약 그를 만난다면 ‘주착도 그런 주착이 없다. 나이는 어디로 먹었냐’고 할 것이 틀림없다.
위쪽은 벤트 해머 감독의 영화 ‘오슬로의 이상한 밤’, 아래쪽은 우디 앨런 감독의 ‘환상의 그대’의 한 장면. |
강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한국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죽음의 그림자를 예감하고도 생의 마지막 사랑과 의무를 다하는 가난한 노년들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사별한 아내와의 사이에선 가부장처럼 군림했던 남자(이순재)는 인생 마지막 길목에서 찾아온 새로운 사랑(윤소정)을 소년처럼 시작하고 속죄하듯 지켜낸다. 치매에 걸린 아내(김수미)의 손을 마지막까지 꼭 잡아주는 또 다른 남자(송재호)의 사연도 뭉클하다.
노르웨이에서 날아온 영화 ‘오슬로의 마지막 밤’은 평생 한번도 궤도를 벗어나지 않았던 삶이 단 하루 ‘탈선’을 일으키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40년 동안 매일같이 노르웨이 오슬로~베르겐 구간을 오가는 기차를 운행해온 기관사 오드 호텐(바드 오데)이 주인공이다. 기차 운행시간만큼이나 변함없는 삶을 살아온 그는 정년이 돼 은퇴 하루를 남긴 마지막 밤. 동료들이 열어주는 파티에 참석하기로 한다.
그런데 일이 괴이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파티장을 못 찾아 엉뚱한 집으로 발을 들이는가 하면 마지막 기차마저 놓친다. 눈을 감고도 운전할 수 있다는 남자가 동승을 요구하기도 하고, 거리에서 마주친 이로부터 초대를 받기도 한다. 예측 가능했던 이제까지의 삶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단 하룻밤. 진짜 인생은 어디에 있는 걸까.
오는 3월 개봉하는 마이크 리 감독의 영국영화 ‘어너더 이어’는 한 노부부의 사계절을 통해 인생과 관계의 의미를 반추한 수작이다. 지질학 엔지니어인 톰(짐 브로드벤트)과 정신과 카운슬러인 제리는 영국 교외에서 여유로운 노년의 삶을 만끽하고 있는 부부다. 밭과 정원을 가꾸는 이들에게 휴식과 위로가 필요한 벗들이 찾아온다.
제리의 친구 메리(레슬리 맨빌)는 젊은 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불안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사는 여성. 언제나 술에 취해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톰과 제리는 그녀를 따뜻하게 맞아준다. 톰의 친구인 켄은 퇴직을 앞두고 있는데 폭식과 담배로 자기절제를 못하고, 성격마저 유아적인 인물이다. 영화는 이들과 주변 인물들의 소소한 에피소드를 통해 가족과 관계, 우정과 외로움, 욕망과 사랑 등의 이야기를 나지막이 들려준다.
인생은 매번 헛발질을 하는 욕망(‘환상의 그대’)일까, 마지막까지 지켜내야 하는 사랑과 의무(‘그대를 사랑합니다’)일까. 아니면 어느 날 우연처럼 맞게 된 ‘일탈과 판타지’일까(‘오슬로의 마지막 밤’), 늘 또 맞게 되는 사계(‘어너더 이어’) 같은 것일까.
앤서니 홉킨스와 이순재, 짐 브로드벤트, 바드 오데 등 무엇보다 극중 인물들의 나이만큼 연륜과 내공이 쌓인 배우들의 연기가 스크린에는 ‘축복’ 같은 작품들이기도 하다.
이형석 기자/ su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