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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석의 상상력 사전> 무섭기는 커녕 허름한 요즘 간첩…먹고 살기도 힘들더라
시대에 따라 달라진 간첩영화의 계보
반공정신·경계태세 무장 상징
액션·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 등장
1980년대까지 주로 ‘공포의 대상’

1990년대 이후 인간적인 면에 초점
영화 ‘간첩’ 생계형 현실 보여줘


간첩. 어슴푸레한 새벽 산에서 내려오는 이도 간첩, 지나치게 친절한 아저씨도 간첩, 길을 잘 모르는 사람도 간첩. 인자한 얼굴 뒤에는 악마나 도깨비, 혹달린 돼지(‘똘이장군’)가 있을지도 몰랐다. 지나가던 아저씨도 다시 보고 의심가면 113.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다. 도덕시간마다 되뇌었다.

지금의 40대 이상에겐 악몽이라도 꿀까 할 무시무시한 단어가 간첩이었다. “그것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을 속담으로 알았고, ‘간첩신고’를 ‘로또’로 여기던 시대였다. 간첩 신고와 간첩 검거, 간첩선 포획에 걸린 포상금은 서민들에겐 꿈도 못 꿀 거액이었다.

간첩이라는 말은 스파이나 첩보원, 공작원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말이지만 한때 대한민국에선 특별히 ‘남파된 북한사람’만을 의미했다. 간첩은 공포의 대상이자, 우리 안의 반공정신과 경계태세의 무장정도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였으며, 어떤 이들에겐 일확천금의 요행수였다. 

김명민, 유해진 주연의 영화‘ 간첩’에서 주인공들인 남파 고정간첩들은 이른바 ‘생계형’ 인물들이다. 수십년, 수년 동안 남쪽에 살면서 먹고 사는 게 힘들어진 서민형 간첩이다. 세월은 간첩도 변하게 했다.

김명민ㆍ유해진 주연의 영화 ‘간첩’에서 주인공들인 남파 고정간첩들은 이른바 ‘생계형’ 인물들이다. 수년, 수십년 동안 남쪽에 살면서 먹고 사는 게 힘들어진 서민형 간첩이다. 세월은 간첩도 변하게 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한국영상자료원에 남아 있는 자료 중 간첩을 소재로 한 가장 오랜 극영화는 1946년 제작된 ‘똘똘이의 모험’이다. 아동용 반공영화다. 간첩 잡는 어린이들의 모험을 다룬 반공영화는 ‘창수만세’(1954)로 이어지고 1970년대 애니메이션 ‘똘이장군’ 시리즈로 절정에 이르렀다.

1954년 제작된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은 여러모로 한국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바걸’로 신분을 감춘 여간첩 ‘마가렛’과 방첩대 청년장교 간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 스릴러 액션 영화였다. 여간첩이 등장한 것은 한국영화 최초였으며, ‘바걸’로 위장한 여주인공은 청순미와 퇴폐미를 동시에 갖춘 ‘팜파탈’로 당시로선 선구적인 여성상이었다.

이 작품은 한국영화 최초의 키스신이 담긴 작품으로도 남아 있다. 간첩 소재는 반공이라는 주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액션, 로맨스, 스릴러, 갱스터, 첩보물 등 한국영화 장르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탁류’ ‘비밀통로를 찾아라’ ‘육체는 슬프다’ ‘붉은 장미는 지다’ ‘빼앗긴 일요일’ ‘검은 장갑’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라’ ‘포리호의 반란’ ‘여간첩 에리샤’ ‘제7의 사나이’ ‘동경을 울린 사나이’ ‘그 여자를 쫓아라’ 등 제목만으로도 그 풍요로움을 짐작할 수 있는 수많은 작품들이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여간첩, 액션, 로맨스, 스릴러, 첩보전 등이 어우러지며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1999년 작품 ‘쉬리’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할리우드에서 날아온 것만은 아니었다. 


간첩 소재 코미디 영화도 이미 1950년대부터 제작됐다. 주로 “시련을 겪고 오해를 받던 주인공이 간첩 신고나 간첩 검거의 공을 세워 큰 상금을 받고 행복하게 살았더라”는 줄거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1958년 작품 ‘사람팔자 알 수 없다’가 전형적인 사례였다. 미움받던 며느리가 간첩을 잡아 시가와도 화해하고 행복하게 됐더라는 이야기를 담은 ‘팔푼며느리’라는 영화도 있었다. ‘후라이보이 박사소동’ ‘잡았네요’ ‘역전중국집’ ‘요절복통 일망타진’ ‘소문난 구두쇠’ 등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들인 서영춘, 구봉서, 곽규석, 양훈, 양석천을 기용하고 간첩을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들이 1970년대 초까지 큰 인기를 누렸다.

이러한 한국영화의 전통을 뿌리로 하는 간첩 소재 영화는 코미디, 스릴러, 휴먼드라마 등으로 계승돼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꾸준히 제작됐으며 최근 다시 붐을 맞고 있다. 그 중의 특기할 만한 경향은 간첩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며 분단의 비극을 조명하는 휴먼드라마다. ‘간첩 리철진’은 남파되자마자 택시 강도에게 당한 어설픈 간첩을 주인공으로 했으며 ‘의형제’는 북으로부터의 연락선이 끊어져 고립된 남파 간첩을 주인공으로 했다. ‘간첩’까지 포함해 북의 경제난과 냉전의 해체로 인해 사실상 ‘무적자’로 간첩을 그리는 시각이 새롭다. 현재 제작 중이거나 개봉 예정인 간첩영화로는 ‘베를린’이 스릴러 첩보물의 전통을 잇고 있으며 ‘은밀하게 위대하게’와 ‘동창생’은 각각 청춘 스타 김수현과 최승현을 내세운 ‘꽃미남 간첩’ 영화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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