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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사이시 조...거장의 손 끝에서 그려지는 위로의 선율
[히사이시 조:JOE HISAISHI ASIA TOUR 2010-2011]

거장의 손 끝에서 살아난 음들은 한 곳으로 응집됐다. 소리가 만나는 곳엔 선율이 흘렀으며, 그 선율에는 ’익숙한’ 감동들이 마디 마디 배어나왔다.

일본이 낳은 ‘영화 음악의 거장’ 히사이시 조는 몸도 마음도 차갑게 얼어버린 겨울의 한 가운데인 1월 18, 19일 저녁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이 공연은 히사이시 조의 2010-2011 아시아 투어의 일환이었다. 일본을 거쳐 홍콩, 대만, 중국의 상해ㆍ광주를 지나 한국에 온 히사이시 조, 그동안 이어왔던 아시아 투어의 마지막 일정인 19일 이날 무대에서 거장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들려주겠다”고 약속했다.

6년만에 서울을 찾은, 환갑을 목전에 둔 거장은 이미 세 번째 호흡을 맞추는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1막을 열었다. 객석이 숨을 죽일 시간이었다. ‘미니마 리듬(Minima Rythm)‘의 수록곡을 들려주는 히사이시 조, 그의 손 끝에서는 지휘봉이 능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히사이시 조는 영화음악 감독으로 더 유명하지만 사실 그는 현대음악 작곡가로 음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히사이시 조의 미니멀 뮤직에 대한 관심은 그가 이날 공연에서 들려주는 곡들에 녹아났다. 그것은 대중에게 익숙한 영화음악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미니멀 뮤직은 짧은 선율이 반복되면서도 그 안에서의 다양한 변화가 귀를 놀라게 한다. 이 위에는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얹어지지만 현란하고 복잡하기 보다는 장엄하고 섬세하다. 귀에 익은 멜로디가 아니라 해도 그것은 아름답다.

히사이시 조의 영화음악에 익숙했다면 ’미니마 리듬‘의 수록곡은 다소 낯설 수 있으나, 클래식에 기반을 둔 히사이시 조의 음악답게 ’기승전결‘이 분명함을 느낄 수 있다. 거기에 ’The End of the World‘의 수록곡에서는 보다 실험적인 히사이시 조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9.11 그 이후‘를 테마로 3악장으로 구성된 ’The End of the World‘는 사운드가 만드는 웅장한 현의 향연이 흥미롭다. 특히 ’Collapse‘에서 첼로가 음의 시작을 알릴 때는 9.11로 붕괴된 한 세계를 향한 비탄이, 뒤이어 재건을 향한 희망이 3악장의 ’Beyond the World‘를 통해 전달된다. 아쉬운 것은 이 묵직한 메시지를 녹여낸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사운드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안에서는 산산이 흩어진다는 점, 이에 귀가 예민한 관객들은 몰입이 덜 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오묘했던 1부를 내린 뒤 ’멜로디포니(Melodyphony)‘라는 제목의 2부에 접어드니 검은색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무대 중앙으로 자리했다. ’멜로디포니’는 멜로디를 심포니로 연주한다는 의미였다. 특히 히사이시 조가 미야자키 하야오와 주로 작업한 애니메이션 음악을 런던 심포니와 협연한 앨범 ’멜로디포니‘와 동명이며, 그 앨범의 수록곡을 연주한 무대이기도 하다.

이제 익숙한 감동이 시작된다. 우리가 잘 아는 이 ’영화 음악의 거장‘이 만들어내는 음의 세계는 ’아름답다‘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아름다운‘ 세계다. 굳이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삽입된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 해도 상관없다. 이미 히사이시 조의 음악에는 하얀 도화지를 세상의 빛깔로 물들이는 마법이 담겨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건네는 화해의 악수이고, 마음이 마음으로 이어지는 위로의 선율이다.

영화 ’굿바이‘는 안녕을 말하지만 그것은 다시 시작을 의미했다. 2부의 첫 곡 ’Departures(디파처스)‘는 다키타 요지 감독의 ’굿바이‘에 삽입된 곡이었다. 영원한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좋은(Good) 안녕(Bye)라는 의미가 첼로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더듬었다. 그 위에 히사이시 조의 피아노가 얹어지다가도 그의 손은 이내 오케스트라를 통솔한다. 그 손 끝이 빚어내는 움직임에 오케스트라는 일사분란하게 멜로디를 흘려보내고, 관객은 이 서정적인 위로에 젖어든다.

이어지는 곡은‘마녀 배달부 키키’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수록곡인 ’바다가 보이는 거리‘와 ’그 여름속으로(One Summer‘s Day)’다. 한 곡 한 곡이 지날 수록 객석의 박수소리는 커져갔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에 수록된 ‘서머(Summer)’에서 연주자들이 바이얼린과 첼로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맑은 소리를 낼 때, 객석은 한여름 어딘가 떠났던 소풍을 떠올렸을 것이다. 한창 땀을 흘리며 여름의 소풍을 마쳐갈 무렵엔 시원한 바람이 굽이쳐들어오는 깊고 푸른 밤하늘 아래 서게 된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 수록된 ‘비둘기와 소년’에서 트럼펫의 독주가 하늘을 향할 때 그 애니메이션의 소년 소녀가 아니더라도 이미 객석은 자기 삶의 가장 순수한 시절을 향한 그리움을 만끽하게 된다.

사랑스러운 '포뇨'의 이야기가 들려오고 ‘이에몬’의 CM곡 ‘오리엔탈 윈드’까지 마치자 객석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거장을 환호했다. 숨죽인 탄식은 끊이지 않는 박수를 불러왔고 그 위에 덮어지는 함성은 히사이시 조가 만든 또 하나의 음악세계였다.

히사이시 조가 선사하는 감동은 식을 줄을 모르고 이어졌다. 하울의 이상한 성이 하늘을 움직일 때 이 음악이 흐르면 이중적인 감동에 사로잡힌다. ‘인생은 회전목마’라는 제목이 가져다주는 중의성과 이 음악의 단조풍 멜로디와 그것을 연주하는 피아노의 따뜻한 소리는 아이러니한 조화다. 히사이시 조의 피아노로 이 곡이 시작될 때 객석은 기다림의 탄식을 뱉었고, 곡이 끝나갈 때는 하울의 성 안에서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토토로’와 함께 잠시 동화 속의 세계에 들렀다 이내 이어지는 히사이시 조의 솔로 피아노에 객석은 거장을 향해 진심의 박수를 보냈다. 

두 팔을 벌리고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작은 거장’의 숨결은 불빛이 화사한 공연장을 어둠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 곳에 홀로 서 눈부신 빛을 발하는 히사이시 조를 향해 객석은 떠나갈 듯한 박수를 보냈다. 6년 만에 찾은 한국에서의 마지막 공연의 주인공을 향해 관객들은 다시 앉을 줄을 모른 채 꼿꼿이 선 채로 그를 배웅했다.

<고승희 기자 @seungheez>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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