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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주기’ 백남준, 그의 인생에 되감기 버튼은 없다
‘인생에 되감기 버튼은 없다.’

1003개의 텔레비전이 18m로 층층이 쌓아올려지면 ‘다다익선(1988,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작품이 태어난다. 여기에서 ’1003’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하늘이 열리던 ‘그 날’ 10월 3일이라는 뜻이다. 청년 백남준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리고 해맑은 미소를 지은 채 의자에 앉아 있으면 이는 ‘TV의자(1976, 쾰른 미술관)’가 된다. 13개의 모니터와 알루미늄 구조물로 된 단일채널 비디오 조각, 이것은 로봇가족(1986, 고야 시립미술관)이다. ‘로봇’이라는 테크놀로지의 세계에 ‘가족’이라는 온정을 불어넣었다.

▶ ‘성공한 반란자’ 백남준의 5주기=어느새 5주기다. 결코 나이들지 않는 천재 백남준(1932~2006)이 떠난 시간, 1월 29일이다. 단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부족하지 않나. 2006년 타임지가 선정한 ‘아시아의 영웅’이며 1999년 미국의 미술전문지 ‘아트뉴스’가 선정한 지난 1세기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25인(피카소 등) 중 한 사람인 백남준이다.

거꾸로 돌아가는 법이 없었다. 우리네 인생에선 결코 ‘되감기’가 불가능하다는 백남준의 예술은 놀랍도록 확장된 상상력과 창의력이 점철된 세계였다. 해체와 재구성의 세계였다. 여기서 말하는 해체와 재구성은 역사일 수도 있고, 철학일 수도 있으며, 과학일 수도 있다. 

실험적인 행위음악(1960,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 비디오아트(1965, 자석TV), 플럭서스(1967,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퍼포먼스(1990, 요셉 보이스 추모굿), 위성중계예술(굿모닝 조지 오웰) 등 정의된 사조로는 규명할 수 없는 전방위 아티스트였던 그는 현대미술 역사상 ‘성공한 반란자’로 남아있다. 내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랐다면 미친 짓일지라도 그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른 행위는 위대한 예술이 되기 때문이다.

▶ 脫ㆍ脫ㆍ脫...전방위 아티스트 ‘백남준의 길’=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 홍콩 Royden School에서 수학한 백남준은 195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이후 1956년 독일 유학생활을 시작, 뮌헨 부르비하막시밀리한 대학교에서 음악학과 미술사를 공부하며 미술계로 입문한다. 재미있는 것은 백남준을 ‘백남준의 길’로 이끈 시작은 미술이 아닌 음악이었다는 점이다. 백남준과 존 케이지의 만남(1959, 존 케이지에 대한 찬사)가 그러하다. 

여기에 또 하나, 백남준의 이야기를 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바로 ‘플럭서스(Fluxux)’다. 1960년대 초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예술 운동, 혹은 급진적 예술운동이라는 수식어로 설명이 가능하다. 조지 마키나우스에 의해 설립된 플럭서스 운동은 ‘삶과 예술의 조화’를 기치로 내걸었다. 독일의 주요 도시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해 유럽ㆍ미국ㆍ아시아 등으로 빠르게 전파되며 전세계에서 동시대에 일어난 예술의 움직임이었다. 시간차는 거의 없었다. 교류에 ‘자유’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 서신 교환은 플럭서스 작가들에게 또 하나의 예술의 형태였다. 그리고 이는 탈장르적인 예술이었다. 콘서트, 이벤트 출판, 선언문 등에 사용됐다. 미술에서 시작한 플럭서스는 보는 예술에서 벗어나 듣는 예술, 행위 예술로 확장됐다. 그 가운데 백남준이 있었고 이 안에서 백남준은 평생의 동반자 구보다 시게코도 만나게 된다.

백남준에게 예술의 확장은 1984년 한 번 더 이뤄진다. 조지 오웰과의 만남으로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백남준의 확장된 예술을 보여주는 ‘위성중계예술’이다. 위성과 비디오 TV를 통해 조지오웰의 ‘1984’를 뒤짚는다. ‘빅브라더’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즉 기술이 인류를 지배하는 부정적이고 암울한 시각이 아닌 기술로 인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는 백남준의 세계가 바로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었다.

▶ 백남준을 그리워하며 백남준을 기리는 법=5주기를 맞아 최근에는 백남준을 추모하는 굿과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 25일 서울 안국동 갤러리아아트링크에는 백남준 굿 전이 열렸다. 1990년 백남준이 독일 작가 요셉 보이스를 추모하기 위해 굿판을 벌였던 것처럼 그렇다. 왜 이러한 주술적 행사였을까. 이것은 다시 백남준의 예술 세계로 귀결된다.

“내가 작품을 만들 때 무의식으로 만들지만 나에게 가장 영향은 준 것은 무당이다. 매년 10월이 되면 어머니는 1년액을 때우기 위해 무당을 부른다. 24시간 해프닝이 된다. 혼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히 밤에 이루어지는 예술, 그것도 그녀의 예술이 된다. 무당은 돼지머리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 춤춘다. 그 리듬은 중국 아악 리듬과는 전혀 다르다. 한국의 리듬은 싱코페이션이 있는 삼박자로 3박자, 5박자, 7박자로 이어지는 홀수가 많다. 내가 작곡하면 거의 3박자, 5박자가 되던 것은 결국 한국의 미술...그중에서도 민중의 시간예술, 춤, 무당의 음악에 가까운 것이다.”

백남준의 세계는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가 없다. ‘진취’ ’혁신’ ‘돌발상황’ ‘충동적 사건’ 전위‘라는 단어들을 조합해도 부족한 시대를 앞서 산 예술가이고 눈으로 좇는 세상의 모든 그림을 영상으로 만들 수 있었던 예술가다. 캔버스를 TV가 대체할 것이라 확신하던 기이한 예언자다. 정착하기보다는 뻗어나가고 돌아보기보다는 앞서나가는 영원히 죽지 않는 예술가 백남준을 기리는 방법이 있다. 우리의 인생에도 그처럼 되감기를 하지 않는 것, 그것이다.

<고승희 기자 @seungheez>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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