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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읽기-정재욱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저축은행 vs 파이낸스
영국의 정치학자이자 역사학자인 E.H. 카는 역사철학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반복되는 역사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갈파했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 오늘의 관점에서 과거를 성찰하고,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과거 실패 사례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사회는 정체되고 역사는 후퇴한다. 우리는 성공의 길을 이어가고 실패의 아픔을 반복하지 않는 교훈을 과거 사례를 통해 배우고 있는가.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경악과 충격의 부산저축은행 사태만 해도 그렇다. 그 양상이 1999년 이른바 ‘파이낸스 사태’와 놀라울 정도로 닮은꼴이다. 다만 유사수신업체인 파이낸스는 상법상 주식회사일 뿐 금융회사가 아니다. 엄밀히 말해 파이낸스 사태는 금융비리가 아니라 일반 사기사건이었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금융당국의 감독을 받는 부산저축은행 사태와 비교하는 것이 격(?)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주 무대가 부산이라는 점이 우선 같다. 파이낸스는 1990년대 후반 부산에서 시작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부산에는 ‘한 집 건너 한 집이 파이낸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업체가 난립했다. 고율의 투자수익금(이자)을 제시하고 돈을 끌어들이는 신종 투자회사로 삼부파이낸스가 그 대표 격이다. 1996년 설립한 이 회사는 외환위기로 부산지역 종금사와 동남은행이 퇴출되는 금융공백기를 틈타 2년 만에 전국에 54개 영업점과 일본 오사카, 미국 뉴욕 등 해외 현지법인을 둘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 영업 초기부터 연 25%의 고율 이자를 착실히 지급하며 신용을 쌓았고, 고수익에 고무된 고객들은 연일 돈을 들고 영업점을 찾았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규모가 커지자 대주주와 경영진은 고객 투자금을 비밀리에 개인 계좌로 빼돌려 800억원을 가로챘다. 내부 공모자들은 별도의 사무실에서 이를 관리했다. 검찰 수사가 시작되고 대표이사가 구속됐지만 오너는 돈을 들고 외국으로 도주했다. 대주주와 임직원의 조직화된 도덕적 해이가 너무 닮았다.
영업정지 직전 일부 고객과 회사관계자들이 대거 돈을 인출해간 점도 비슷하다. 당시에도 이른바 상위투자자로 불리는 일부 관계자는 그 낌새를 알아채고도 일반 투자자들에게는 “아무 일 없다”고 속이고 자신들은 투자금을 재빨리 회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사수신업체의 피해 사례가 속속 드러났다. 부산지역에만 6만명에 1조원의 피해를 입혔다.
법의 보호 한도를 넘은 부산저축은행 예금자를 구제하겠다며 지역 국회의원들이 관련법 개정안을 들고 나와 국민들 눈총을 받았다. 그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파이낸스사는 예금자 보호 대상이 아니었지만 지역 국회의원들은 공적자금을 투입하자는 엉뚱한 발상을 하다 비판 여론을 의식, 뜻을 접었다. 하지만 유권자인 피해자들에게는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은근히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효과는 충분히 거두었을 것이다. 표를 위해서는 법과 상식을 예사로 벗어나는 정치인들 행태는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파이낸스 사태는 그해 말 ‘유사수신행위 규제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일단락됐다. 부산저축은행 사태에 대한 검찰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부도덕한 대주주 등 경영진과 금융당국 실무자들이 유착했는지 여부를 검찰이 조사 중이라고 한다. 단군 이래 최악의 금융비리를 다루는 검찰의 책무가 무겁다. 파이낸스 사태를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해 더 큰 비리가 터졌다. 이번에는 외양간을 제대로 고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더 엄청난 사건이 다음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번 사건의 교훈의 핵심은 ‘금·융·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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